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시오스 3세 (문단 편집) == 평가 == || [[파일:1204년 동로마 제국.png|width=100%]] || || 알렉시오스 3세 시기 [[동로마 제국]]의 강역. ||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는 개인적으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재능은 갖추고 있었지만 장래를 생각지 않는, 혐오스럽고 게으른 인물이었다. 그의 권력 장악은 이미 유행병처럼 번져버린 음모와 반란이 더 많이 한꺼번에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결과밖에 초래할 수 없었다. >---- >― 워렌 트레드골드 알렉시오스 3세의 치세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매우 좋지 않다. 그의 통치기간은 본인의 찬탈로 말미암은 각종 스노우볼을 수습하는 것으로 점철되었으며, [[4차 십자군]]이라는 끔찍한 형태로 종말을 맞았다. 그 때문인지 대중적 인식 역시 좋지 않은데,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동로마 관련 서적에서 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조망하는 책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며, 해외의 동로마 관련 유튜버들이 최악의 황제를 꼽을 때 [[포카스]], [[알렉시오스 4세]]와 더불어 당당하게 꼴찌를 다툴 정도이다. 그러나 이미 전임자들의 삽질로 인해 산산조각나고 있었던 제국의 운명 속에서 이 인물이 부당하게 파국의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한 예로, 동시대인으로서 가장 가까이 [[앙겔로스 왕조]]의 혼란을 지켜봤을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서술에서도 알렉시오스 3세에 대한 최종평은 그렇게까지 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암군으로 일단락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제공하는 점이 있다. ||(전략) 국사의 행정에 있어서 온전히 뛰어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영역에서까지 비판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방식의 부드러움에 있어서 그는 타인을 능가했다. 그는 접근을 불허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흉포한 얼굴로 시민을 물리친 적도 없었다. ….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청원할 수 있었고 때때로는 발언의 자유에 제한도 받지 않은 채 항변할 수 있었다. … 그가 우울이 깃든 자줏빛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여성도 어두운 죽음을 맞은 자신의 남편을 애도하기 위해 검은 모자를 쓰지 않았다.|| 폴 막달리노(Paul Magdalino)는 자신의 책 『[[마누일 1세|마누일 1세 콤니노스]]의 제국, 1143-1180』(''Empire of Manuel I Komnenos, 1143-1180'')에서 알렉시오스 3세 정권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평가한다. ||알렉시오스 3세의 정부는 그러므로 상당한 영토적인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그 정권이 국내적인 지위를 안정시킨 1202년 이후에는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는데 이 기반 영토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한 모든 가능성을 쓸어버린 것이 4차 십자군이며... (후략) - 에필로그 중||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또한 본인의 저서 'Byzantine Republic'의 112쪽에서 사회지도층(관료층-magistrates, 원로원-Senate)과 일반시민(demos)을 불문하고 동생 이사키오스 2세에 대한 알렉시오스의 쿠데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In 1195, Isaakios II Angelos was deposed by his brother Alexios III. “The magistrates of the politeia had already acclaimed him, and his entrance had been prepared in advance by his wife Euphrosyne. As for the Senate, at least a part of it happily accepted what had hap- pened. When the dêmos heard the announcement, they engaged in no seditious behavior: from the start all of them were calm and ap- plauded the news, neither protesting nor becoming inflamed with righ teous anger at the fact that the army had removed from them their customary right to appoint the emperor.”|| 그러나 이는 지독하게 인기가 없었던 동생을 폐출시킨 형에 대해 제국의 사람들이 환호했다는 것에 불과하지,[* 한 예로 제국의 친서방 기조를 청산해줄 것으로 여겨진 [[안드로니코스 1세]]가 불과 12년 전에 얼마나 많은 기대 속에 즉위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급격하게 하락세를 겪는 제국의 신민들 역시 변덕스러웠다.] 찬탈이 대외적으로도 납득 가능한 행보로 여겨졌다는 뜻은 아니다. 조선 [[인조]]나 베트남의 [[호계리]]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찬탈은 이유를 불문하고 외국에게 좋은 침략의 명분이 된다.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는 찬탈자 알렉시오스 3세에 대해 침공을 할 조짐을 보였고, 알렉시오스 3세는 이를 막기 위해 독일세를 걷고 황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촌극을 벌여야 했다. 이런 추태 속에서 알렉시오스 3세 역시 동생처럼 금새 신망을 잃어버렸고, 최종적으로는 [[필리프(신성 로마 제국) |자형]]의 후원을 받은 알렉시오스 4세의 역습으로 자신의 정권까지 전복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알렉시오스 3세는 적어도 무능한 동생이 키워놓은 문제점들에 대해 대처하려는 노력을 했고, 어떤 방면에서는 의외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므로, 오늘날까지 '(예상치 못한) 4차 십자군이 아니었다면 과연 어떻게 통치를 이어나갔을까' 하는 궁금증을 많이 남기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알렉시오스 3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논쟁적이며, '동로마 최악의 황제'라는 혹평 일변도였던 과거로부터는 어느 정도 일신된 평가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